아빠의 길, 아버지의 길
2022년이 되면 제가 운행하고 있는 쏘렌토는 공식적으로 20년된 차가 됩니다. 동시에 30만 킬로미터 이상을 탄 차가 되겠죠.
아이들을 이 차에 태우는 날은 제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아직은 초등학교에 안 들어간 꼬맹이들이죠. 하루는 딸 아이가 차에서 내려 집으로 올라왔는데, 얼굴이 하얗고 표정이 좋지 않았습니다.
'아빠, 차타니까 이상해...'
멀미를 하더군요. 딸 아이의 말에 마음이 아팠습니다. 아빠랑 추억을 쌓아도 모자란 시간에 딸 아이가 울렁거려서 좋지 않은 기억을 가질까봐 못내 미안했습니다. 집에서 눕혀 쉬게 하고, 물도 마시게 해서 안정을 시키니 이내 좋아지긴 했어요. 차를 타고 울렁거렸는데도 타요를 보면서 좋아하는 딸 아이의 모습을 보니 저도 안심이 되긴 했지만, 걱정거리가 하나 생겼습니다.
아버지가 이 차를 운행하시던 시절, 저는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쏘렌토 뒤에서 크게 멀미를 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대개 잤죠. 하지만 이내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아직, 아버님께서 첫 차인 엑셀을 사기도 전이던 시절, 택시만 탔다하면 토하는 아들 덕에 택시 매트와 시트를 여러번 빨고 변상하셨던 부모님이 떠올랐습니다. 저도 어린 시절에 비위가 크게 좋지는 못했던 셈입니다.
아무리 발컨트롤을 한다고 해도, 주말에 조금만 밀리는 길을 가게 되면 아이들은 힘들어 합니다. 쏘렌토 초기형이 프레임바디라는 특징이 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킵니다. 솔직히 이 연식의 쏘렌토 2열 승차감이 좋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서스펜션 세팅은 매우 단단한 편이라 노면의 잔진동이 그대로 다 느껴지고, 공차중량도 가벼운 편이 아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급브레이크를 사용하게 되면 아이들은 울렁거릴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무리하지는 않더라도, 눈 딱 감고 바꿔볼까.'
일주일이 넘게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습니다. 마침 다양한 SUV들이 출시되는 상황입니다. 쏘렌토도 세대를 거듭하여 하이브리드 차량이 출시되고 있고, 팰리세이드나 GV80처럼 대형 SUV들도 출시되고 있습니다. 물론 제네시스 브랜드는 가격이 만만치 않지만, 4천만원 내외에서 SUV를 구입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는 않아서, 솔직히 차를 바꿀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마침 주변 동료중에 아이들이 많은 경우는 혼다 오딧세이나 카니발을 운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도 합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여기저기 차의 미운 구석만 보입니다. 핸들 스티치 부분에는 때가 끼어 갈색으로 변색되었고, 범퍼는 네 번째 깨져 있는 상태이며, 오디오 유닛의 플라스틱도 끈적이고, CD는 맨날 튀는 차. (CD와 카세트!!) 이제 정말 보내줄 때가 된 것이 아닌가. 다른 집 아이들이 카니발 하이리무진에서 유튜브로 뽀로로보며 차를 타는 아이들이 있는 것도 압니다. 제가 두려운 것은 결국
'아빠 차 타면 맨날 토하구, 티비도 안나오구, 아빠 차 안탈래요.'
...라고 말하는 제 아이들, 이게 정말 두렵더군요.
그러나 자동차라는 소비재에 큰 돈을 쓰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닙니다. 성급하게 차를 바꾸려는 생각을 누르고 이번 주말에 아이들을 태우고 운행을 마치고 집에 돌어왔어요. 그리고 딸 아이에게 물어보았죠.
'딸, 아빠 차 타는 거 힘들면, 아빠가 차 바꿀까?'
'왜?'
'지난 주에도 차타서 울렁거리고, 우리 딸 더 편한차로 바꾸면 좋지 않아?'
'아빠, 그냥 아빠 차 타는 거 좋아. 그날은 차가 많았잖아. 그러니까 아빠 차 안 바꿔도 되요~'
저, 딸아이 안아주고나서 방에 들어가서 울었어요. 자기 편한 것보다 아빠 생각해주는 아이가 자랑스럽고, 안쓰럽고, 미안했습니다. 아직 7살 아이가 저런 대답을 하는 것, 아빠로서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해집니다.
이 글부터 보시는 분께서는 이상하게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이 말도 안되고 오래된 은색 쏘렌토에 저를 태우고 다니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운행도 생각이 납니다. 평창에서 열리는 학교 행사에 아직 대학을 떠나지 못한 저를 데려다주셨죠. 저는 그냥 탔을 뿐이지만, 아버지는 그 때 이미 암 말기셨습니다. 그 때 이미 3기 이상 진행된 상태였던 걸 뒤늦게야 알았죠. 퇴직한 아버님은 당신께서 건강이 심각한 상태임을 직감적으로 아셨을텐데도, 아들을 위해 아픈 몸으로 고속도로 주행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아버지와 이런 딸을 두었다는 것,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되서 가슴에 오늘도 남아 있습니다.
영원히 탈 수 있는 자동차는 없겠죠. 그런데 제가 차를 바꿀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