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는 자유다
쏘렌토는 당신께서 남긴 것이다.
이 차는 아버지의 분신도 아니고, 뭔가 성스러운 물건도 아니며, 유산으로서의 영속성을 지니는 물건도 아니다. 이건 차량이고,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 이동하는 탈 것이며, 시간이 지나면서 감가 상각이 진행되는 물건이다. 하지만 이차를 몰게 되면서 이전에는 전혀 몰랐던 운전하는 생활, 차량의 관리, 가족과 지인을 차에 태우고 운전하는 것의 의미를 새롭게 배워간다.
차는 구식이고 이 차는 속도를 즐기기 힘든 차고, 험준한 오프로드를 마구 달리기엔 연식이 꽤 되었으며, 내가 뭔가 있어보이는 레저 생활을 즐기지도 않는다. 센터페시아에 화려한 LED같은 거 없고, 오히려 군데군데 세월의 상처가 남았다. 정말 최소한의 최소한의 관리가 되어 있으며, 범퍼는 흠과 찌그러짐으로 가득하다. 게다가 이 차는 기름 먹는 하마다.
그래도 난 이 차가 좋다. 기능에 충실한 4단 미션과 프레임 바디가 주는 왠지 모를 든든함을 즐긴다. 도로 상황을 봐가면서 파트 사륜 기능을 쓰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도로에서 보여주는 차량의 기능에는 문제가 없음에 매우 만족하며 타고 있다.
다만 가끔, 10년이 넘도록 초기 순정 상태에서 한 번도 교환하지 않은 디퍼런셜 오일을 갈면서 당신께서 어떤 식으로 생활하셨는지 미루어 짐작하게 된다. 열 돌을 넘긴 차치고는 깨끗한 실내와 부식이 비교적 적은 하부, 카페인트를 바른 자국, 타이어의 마모 따위를 보면서 다 큰 아들을 태워다 주겠다는 제안을 했을 때 내가 매번 거절해야만 했었는지, 생각해 본다.
지금까지 이 차는 12만 킬로미터를 뛰었다. 이 차를 능력껏 관리해 앞으로 10년을 더 타는 것이 목표다. 10년이 더 지났을 때 이 차의 누적주행거리는 몇 킬로미터나 되어 있을까. 10년의 세월이 먼저 올까 아니면 50만 킬로미터가 먼저 올까. 차라는 건 영원히 달릴 수는 없는 기계지만, 이 차가 달릴 수 있는 한 난 어디든 갈 수 있다. 쏘렌토를 몰게 되면서부터 내게 주유는 곧 자유다. 지난 가을 아무 이유 없이 이 차로 단양 팔경을 돌았다. 필요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그 당시 이유없는 주행이, 내겐 정말 필요했다.
앞으로 이 차의 이야기를 하나둘씩 풀어볼 생각이다. 나와 내 가족의 일상사를 함께 하는 것이 내가 이 차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다. 다만 이 차를 가족만을 위한 차로 한정 짓고 싶지는 않다. 적어도 내가 이유 없는 주행만을 위한 차를 따로 장만하기 전까지는.